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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정직?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루터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죄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옷 입고 서면 의인이다. 코람데오는 바로 이 의미이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됨. 이신칭의의 원리가 이 코람데오에서 나온다. 윤리적 정직성으로서의 코람데오는 그 다음에 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이 코람데오는 ‘십자가 신학’, ‘이신칭의’와 함께 루터 신학의 요체이다. 루터의 시편 51편 강해를 통해서 우리는 코람데오와 아울러 회개와 참된 믿음을 배워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셨기 때문에 내가 밤낮으로 이 단어들의 관계. 즉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신앙을 창조하는 말씀이 루터에게는 신학의 기초이기도 하다. 그는 성경의 중심이 그리스도임도 깨달았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약속은 오직 믿음으로 받아 누릴 수 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없다. 깊은 이해를 위해서 외적 말씀을 향한 믿음의 순종이 중요하다. 이처럼 십자가의 신학은 말씀의 신학이다. 이 나라의 밤하늘을 현란하게 수놓고 있는 십자가는 또 다른 형태의 영광의 신학은 아닌가. 우리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는 권면은 자주 듣지만, 십자가와 보혈에 대한 설교를 듣기가 쉽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찬양과 경배라는 독특한 형태의 집회에서조차도 루터가 경고한 대로 십자가를 배제시키고서 막연한 하나님의 영광만을 외치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제쳐두고서 맹목적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영광의 신학의 전형임을 알아야 한다. 문화적 기독교가 특히 경계해야 할 바가 이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원론을 기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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